이런 날씨엔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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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기록함으로서 역사가 될 것이다.
나는 기억이 닿는 나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고 남기고 싶다.
잊고싶지 않고 내가 남기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 슬프기 때문이다.
나는 광주로 간다.
1986년 쯤 나는 진주에서 운암동 주공아파트 67동으로 이사한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당시 5살 가량이었던 나는 제일 작은 장독항아리 하나를 들고 이사를 돕는 답시고 나른 기억이 있다.
우리 가족은 5층 아파트의 1층 좌측의 아파트에 살았다.
소화전 비상벨을 호기심에 눌러 놀란 기억
어두우 저녁 달걀 2개를 사러 갔다 집앞 계단에서 넘어져 깨뜨린 기억
비오는 날 창밖으로 비냄새를 맞으며 덩실덩실 춤쳤던 기억.
누런 햇빛아래 처음으로 백과사전과 과학 만화를 책상에 앉아 읽던 기억.
성마른 아버지가 밥상을 엄마에게 뒤엎던 기억.
이웃 동에 사는 친구 집에서 건담이 나오는 만화책을 처음 봤던 기억.
자연과 어린이라는 어린이 잡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 (특히 그 잡지에 소개된 어린이 요리 사진이 그렇게 먹음직스럽게 보일 수 없었다. 치즈와 햄이 들어있는 하마 모양의 샌드위치가 기억나네)
동네 놀이터의 어떤 할아버지가 돌맹이로 보여준 손장난에 정말로 내 손바닥안으로 돌이 들어간 줄 알고 걱정했던 기억.
눈이 내리는 날 집에 엄마가 없어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와 난로위의 피어오른 주전자 증기기 뒤로 눈내리는 창문을 바라 본 기억.
신나던 유치원 옥상의 롤러스케이트. 하지만 끔직히도 싫었던 그곳의 계피 우린 물.
문봉주라는 친구의 유쾌하고 상냥하셨던 어머니.
누군가로 부터 받은 큰 용돈으로 사먹은 그 당시에 한참 광고를 하던 '삼강 대롱대롱'의 오렌지맛
아버지랑 놀이터 갈때 마다 했던 그네를 열심히 굴러 아버지가 높이 든 손에 발 닿기.
친구네 집에서 본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기념주화 동전들을 몰래 가져나와 바닥에 내동이쳐 꺼낸 기억.
처음 우리집에 빨간 전화기를 설치한 날. 전화번호는 54에 0106. 아버지는 항상 백육번이라고 부르는게 이상했던 기억.
전기오븐을 산 어머니가 자주해 주셨던 초코볼이 들어간 계란케익.
미로같이 생긴 담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놀이터들.
처음 유치원을 가서 칠판에 써있는 글씨를 따라 쓰던 기억.
겨울에 입던 조끼가 눈에 젖어 말리기 위해 난로위에 올려놓다 꼬실라 먹은 기억.
노태우가 당선되었던 대선 때 단지내 건물로 부모님이 선거를 하러 가시던 기억.
엄마와 항상 함께 가던 여탕에서 유치원 선생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는데 엄마와 선생님이 서로 그리 반가워 하지 않았던 기억.
항상 신기한게 가득했던 '종합상가'라는 크고 검은 글자가 벽에 그려진 건물.
그리고 그용도가 항상 궁금했던 철망이 휘감싸고 있는 넓은 잔디밭과 버섯처럼 튀어나온 구부러진 파이프들.
공장안에 집이 있던 현욱이라는 친구의 집에서 들리는 굉음과 그 집에 본 가면맨 만화.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나는 그곳을 다시 찾았다.
내가 무관심하던 사이 재개발이 되어 그당시 흔적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집도, 골목도, 가게도, 놀이터도, 소나무들도 심지어 길 마저.
한눈에 몇층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높고 큰 아파트들이 벽처럼 서서 그 무게감으로 내 모든 기억을 깔아 뭉게버린 것 처럼 느껴진다.
그 모습들은 어릴적 공상과학만화에서 보여주던 회색빛의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모습과도 같아 보인다.
사진을 찍은 위치의 오른쪽에 내가 살던 67동이 있었다.
그리도 앞으로 보이는 길 끝에 관리사무소라는 건물과 높은 굴뚝이 있었다.
67동의 건너편도 넓은 벽이 서있다.
내 기억이 사라져서 느끼는 미움을 떠나 이런 폐쇄적이고 거대한 건물이 주는 위압감이 과연 살기 좋은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보아도 맘에 들지 않는 곳이다.
보이는 건너편엔 봉주네 집, 내가 다니던 '선일유치원'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당시 그만큼의 규모와 시설을 갖춘 유치원은 흔치 않았을 것 같다. 총 3 규모였고 램프로 꼭대기층에 다달으면 바닥 전체를 초록색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난 그곳에서 자주 롤러스케이트를 빌려탔었다. 기억으로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었다.
유치원에 대한 기억은 정말 이렇게 떠올릴려고 하면 계속 쏟아져 나온다. 그이유는 아마 내 어린시절의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몇달전 내가 살았던 이 곳을 돌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나무 한그루, 놀이터의 놀이기구 하나까지 완벽하게 눈앞에 펼쳐졌던게 너무 인상 적이었다.
이곳에서의 기억은 따로 하나하나 적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자극과 인상들이 나의 인격과 성향이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보이는 사진의 왼편이 67동이 있던 곳이다. 사진이 흐린만큼 내 유년의 기억도 먹구름이 드리워 진듯 하다.
오른편에 있던 종합상가 건물은 나에겐 환상의 공간이었다. 다양한 물품들을 파는 점포들이 모여있던 상가는 어린 나에게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여있는 장소로 느껴졌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우체국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700여 미터를 가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나온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3년동안 단 한번도 내가 살던 아파트를 오지 않았다. 나의 포근했던 자궁같은 집이 없어지고 난 지금 당시의 나의 무관심이 가장 안타깝다.
난 아직도 67동 1층 작은 방에서 노란 햇빛을 받으며 책상에 앉아 백과사전을 보며 호기심을 키웠던 어린 나의 모습이 3인칭 시점으로 보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래 사진의 왼쪽이 주공아파트 단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내가 포경수술을 하고, 부러진 오른 새끼 손가락을 끼워맞추고, 감기 몸살이 걸릴 때 다녔던 정찬신 외과가 있다. 외과 담벼락엔 햄버거를 파는 리어카가 있었다. 아삭한 양배추가 캐찹과 마요네즈에 버무려져 구운 고기맛 패티위에 얹혀 은박 포장지에 담겨 따뜻한 유리상자안에 있던 걸 군침을 흘리며 지나다녔던 게 떠오른다.
이골목은 주변의 모든 골목을 누비며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른쪽에 가면 친구가 살았던 상아맨션과 무지개 아파트가 있었다. 상아맨션 뒷편의 작은 화단엔 어떤 할아버지가 아끼시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나는 그당시 석류가 무언지도 몰랐지만 친구가 그것을 보여주며 몰래 따야한다고 해서 그냥 따라 갔었다. 나무 주인 할아버지는 우리가 근처에만 가도 빗자루 같은 걸 들고 우릴 쫓아냈고 우리는 겁먹고 도망갔다가 다시 모래 가까이 가보기도 했다. 석류를 훔치고 싶다기 보단 그런 스릴을 즐겼었던 것 같다.
상아맨션 건너편엔 내 친구가 살았던 무지개 아파트가 있었고 그 친구가 살았던 1층에 종종 놀러갔었다. 꽤 큰 거실이 있어고 나무 기둥으로 만든 큰 테이블이 있었다. 그 친구가 동생이 생겼는데 그 여자애는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큰 소리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고래고래 지르는 소녀가 되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성당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교리 선생님이셨고 아버지는 아마추어 화가셨다. 그 두분이 한 욕을 그 6살 꼬마애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을 찍은 방향으로 우리집이 있었고 우측이 정찬신 외과 가는길, 좌측이 시장으로 가는 길이다. 시장은 그야말로 어린 나에겐 놀이터이자 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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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댐 공사 현장. 거대한 규모로 지어지는 영주댐은 높이 55m, 폭 390m로 담수 1억 8100만 톤을 가둘수 있다. 완공되면 500여 세대가 물에 잠긴다. 이 곳도 내년이면 가카의 뜻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4대강처럼 된다는 소리. 출처:프레시안(최형락)
올해 여름도 참 볕 볼 날이 엄꾸나
금강마을, 금광리라고도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다리위에서 내려다 본 내성천의 아름다운 금모래
정주간이 분리된 팔각 지붕의 고택, 실제로 주민들이 거주 중인 집이 대부분이라 사진찍을 때 실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이 집처럼 버려진 고택도 상당히 많다. 내년이면 마을에 물이 들어차기 때문에 이주를 서둘러야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보상문제가 많다고 한다
마을의 골목길에서 본 기와 지붕들. 슬레이트 지붕보다 이렇게 빛바랜 기와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마을이 오늘날 얼마나 남아있을까? 시장판과 민박촌이 되어버린 하회마을도 이곳만 못하다. 멀리 보이는 높다란 느티나무는 이곳이 예전 나룻터였음을 말해준다
마을 입구에 있던 다른 고택. 구멍난 창호지들과 굳게 잠긴 문으로 보아 오래전 주인이 떠난 듯하다
산소마다 꽂혀있는 흰 분묘이장안내문. 이런 시골의 이름 모를 분묘들의 처지가 도심 한복판 철거민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금강마을에서 꼭 보고싶었던 장씨고택. 주인 할머니께서 출타 중이시라 결국 구경을 못했다.
담장 너머로 들여다 본 고택의 대청마루. 정말 한번 다리 뻗고 누워보고 싶게 시원해 보인다.
차라리 다행일 수도 있다. 아무 약속도 이유도 없이 온 나는 손님도 아니고, 이 곳은 관광지도 아니다. 그냥 이곳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머물러 있을 뿐이고, 나는 아니 온 듯 지나치는 것으로 만족한다.
원래 계획은 내성천을 따라 약 2시간 가량을 걸어갈 계획이었으나 폭염에 포기 하고 말았다.
길가에서 만난 새빨간 열매. 뱀딸기 인지, 복분자인지 확실히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 입에 넣어봤다. 사람이 먹을 만한게 못 된다. 똥인지 된장인지는 꼭 먹어봐야 아는 건 아니었다.
입구에서 관광안내소라고 쓰인 문을 들어서면 나오는 고택 안쪽의 대청마루에서 한참을 앉아 쉬었다. 시간을 초월한 공간에 있는 느낌이다
어딜 가나 이렇게 잘 보존된 고택들을 볼 수 있다. 대부분 마당과 정원이 잘 정돈되어 있고 사람도 꽤 찾는 곳이다.
활짝 열린 대문안으로 보이는 정원과 텃밭이 예쁜 고택. 벽에 기대어 놓은 연장들과 농기구들이 너무 정감있어 보인다
수도리마을 대부분의 기와지붕이 최근에 교체되어있다. 하지만 지붕을 제외하고는 지어진 그대로 보존되어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다. 이집 어르신은 양봉을 하시나 보다
대부분의 고택엔 왼쪽에 보이는 것 처럼 지정된 문화재 안내가 설명되어있다. 대청마루의 파란 모기장 속에 누워 밤하늘을 보며 잠들면 좋지 아니하겠는가
제방을 따라 자료전시관으로 향하는 길, 새 모형의 나무 조각들이 길을 안내한다. 넓은 모래톱과 강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암튼 새 모양이다
강폭이 넓어지면서 흐르는 방향이 바뀌는 곳, 안쪽으로 드넓은 금모래밭이 있다. 물이 맑고 모래도 깨끗해 뛰어들고 싶다
옛날부터 이용했던 외나무다리. 장마철엔 물에 잠겨 떠내려가서 걷어낸다. 반대편에 누가 오면 그가 다 건널때 까지 기다려야 내 차례다. 바쁠게 없이 사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작품
모래톱에서 마을입구쪽 다리를 바라본 모습. 이곳 역시 주변은 산과 강이 둘러싸고있어 아늑하기 그지 없는 마을 분위기다.
고등어의 천적, 전설의 간잽이 이동삼 선생의 후예들이 장악한 하회마을 입구보다 더 훨씬 더 조용하고 아늑하다. 하회는 하회 대로, 수도리는 수도리 대로, 금강은 금강 대로 이대로 남아있으면 한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성천이 더 이상 관광지로 알려지지 않았으면 한다. 사람이 많이 몰려서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
당일치기 여행이라 마음이 조금 급해진다. 마지막 목적지인 예천 회룡포가 남았기 때문이다. 영주서 예천은 버스가 제일 좋다. 시골집 가는 길이라 마음은 한결 편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예천을 다닌지 30년 만에 마침내 처음으로 회룡포를 가게되어 설렌다.
요즘은 티비덕분에 회룡포가 많이 알려져 사람들이 많이 찾지만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길도 제대로 나있지 않는 곳이었다. 회룡포 건너편 모래밭도 동네 사람들이 복날에 개나 삶아 먹으러 왔지 외지인이 찾는 그런 곳이 전혀 아니었다.
암튼 할머니댁에 들러 차만 가지고 후다닥 나와 회룡포 전망대로 향했다. 서울로 돌아갈 버스가 3시간밖에 남지 않은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다행히 날씨는 개었으나 강물이 불어 회룡포의 명물인 뿅뿅다리가 물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복날이 아니라 개 삶아 먹는 사람은 없었지만, 코펠에 라면 삶아 먹는 사람들은 꽤 부러웠다.
이 가운데 쯤 뿅뿅다리가 물속에 잠겨있다. 건너편이 회룡포 마을이다. 물이 차갑지 않다. 수심이 얕아서 햇볕을 받아 수온이 올라간듯 하다. 수영하기 알맞은 온도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회룡포의 위엄! 내성천 여행의 클라이막스. 마을엔 손가락으로 셀수 있을 만큼 적은 가구가 살고있다. 여름에만 볼 수 있는 벼그림. 상모를 돌리고 있는 두명의 남자가 보인다.
어떻게 강이 저렇게 흐를 수 있는지 경이롭다. 어딜 둘러봐도 푸르다. 무엇보다 눈이 호강한 하루였다
회룡포를 끝으로 당일치기 내성천 답사를 마쳤다. 여유가 있고 날씨가 도와준다면 강모래를 걸으며 며칠동안 도보여행을 해도 더 없이 좋을 코스다. 하루 정도는 수도리마을 민박집에서 자는 것도 멋질 것 같다. 급할 것도 없고, 서둘러 봐야 할 것도 없이 그저 강과 그 강을 따라 존재하는 것들 속을 지나 오는 것으로 충분하다.
전통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다. 제삿상에 치킨이 올라가든, 만두가 올라가든 '쌍놈 제삿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귀한 것 일 수록 쓰임을 잘 알아야한다. 안그러면 맞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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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가장 유명한 전래동화인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인터넷에 회자된 일이 있다. 사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그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솝우화에서 묘사된 ‘산신령’ 캐릭터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하지만 집단 무의식과 원형의 개념을 익힌 우리 이론학교 출신 융 학도들에겐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편적인 원형 상들이 문화와 지역에 상관없이 다양한 형태로 설화나 민담 속에 표현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임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복귀하는 의미에서 다음의 세 가지 이야기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옛날 옛적에 안동의 하회마을에 사는 허도령은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그에게 말하길, “너는 산속으로 들어가 집을 지어 그 누구도 보는 사람 없이 탈을 만들어라. 절대 그 누구도 만나지 말 것이며, 어느 누구도 너를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허도령은 그 말씀대로 산속으로 들어가 탈을 깎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마을에 허도령을 흠모하던 처녀가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산속으로 들어가 그가 탈을 깎는 모습을 훔쳐본다. 열심히 탈을 깎던 허도령은 그 처녀를 발견하고는 탈을 마저 완성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린다. 그때 허도령이 만들고 있던 탈은 ‘이매탈’이었다. 그래서 이매탈에는 턱이 없다.
사나운 맹수도 눈물을 흘릴 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오르페우스는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는 험난한 길을 뚫고 저승으로 내려가 저승의 왕 하데스에게 아내들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명 받은 하데스는 둘을 지상을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단, 저승을 완전히 벗어 날 때 까지 오르페우스에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 그리고 에우리디케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건다. 저승을 거의 벗어날 때 쯤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결국 다시 저승으로 떨어지고 만다. 끝내 아내를 못 잊는 오르페우스는 아마조네스의 여인들의 거듭된 청혼을 물리치다 원한을 사 그녀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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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동산에 살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신의 명령을 거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남자는 평생 부양을 위한 거친 노동을,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는 벌에 쳐해 진다.
위의 유명한 세 이야기의 공통적인 모티프는 첫째로 금기, 둘째로 금기를 깨는, 또는 금기를 깨도록 유혹하는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로인해 파멸하는 남성이다. 사실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2주 전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안에 있던 탈 박물관에서 본 하회탈 설화이다. 이 설화를 읽으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매우 유사한 패턴의 주제들이 있다는 사실이 세삼 다르게 느껴졌다. 이야기들 속의 모티프에 표현된 원형 상들과 그 작용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페르조나는 개인이 외부와의 관계를 형성할 때 일종의 가면과 같은 역할을 하는 원형이다. 예를 들어 소방관이라는 페르조나를 가진 개인은 집단 안에서 화재진압과 인명구조라는 직무를 갖는 남과 구분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다. 반면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는 개인의 생물학적 성별과 반대되는 성의 특징을 지니며,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형성에 작용하는 원형이다. 무의식에 있는 이 두 원형들은 서로 대극을 이루며 보상적인 작용을 한다. 이를 융은 “무의식이, 페르조나가 자아를 끌어당기는 힘과 같은 힘으로 자아를 내리누르는 듯하다.”라고 표현한다. 퇴직한 중년의 남성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여성스러워지는 것도 직업적 페르조나가 상실되자 자신의 여성성인 아니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앞선 신화와 민담 속의 남성이 자신의 임무에 매진하는 것은 페르조나의 인력에 해당한다. 그가 신 또는 신에 해당하는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과 임무에 충실해야하고 다른 것에 휘둘리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바로 금기에 해당한다. 그 인력의 의무감은 곧 금기로써 강화된다. 고립되어 탈을 만드는 총각, 아버지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아담, 저승을 탈출해야하는 오르페우스는 신성하고 비장한 의무감, 동시에 금기로부터 비롯된 공포에 사로 잡혀있다.
하지만 페르조나의 강력한 힘에 대한 남성의 무기력함은 곧바로 아니마의 유혹에 취약함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대극의 반작용, 페르조나에 대한 보상으로서 나타난 아니마의 유혹인 것이다. 무의식으로부터의 유혹은 바로 이렇게 아니마라는 원형 상 즉, 여성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런 민담속의 여성들은 이런 비장함과 공포에 쌓여있는 남성들을 그들의 의도와 반대로 향하도록 꼬드긴다. 외부와의 관계에 과도하게 몰입되어 있을수록 한순간에 파멸할 가능성은 커진다. 이러한 사실을 인류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인식했고, 그 위험성을 민담이나 신화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내부의 유혹을 아니마의 화신인 여성들, 즉 팜므 파탈 Famme Fatale 로 이야기 속에 형상화 되었다. 남성의 임무를 방해하고 죽음으로 이끄는 아니마 상들은 사이렌, 스핑크스, 물귀신(처녀귀신) 등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다. 이 파멸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편향된 의식의 위험에 대한 경고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아니마가 파멸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팜므 파탈의 인물로 묘사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성에게 지혜와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 등장하는 팔선녀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이 개인이 100% 창작한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과 종교적 신화의 모티프들을 이용해 작가가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알려진 대로 성서, 각국의 건국 신화도 모두 이와 같은 맥락의 소산물이다. 구운몽의 주인공인 양소유에게 도움을 주는 팔선녀는 아니마의 긍정적인 역할을 표현한 예이다.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가 말한 아니마의 가장 높은 단계인 여신 아테나 역시 성스럽고 지순한 것까지 초월한 지혜를 상징한다.(C.G.Jung 외, 인간과 상징)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니마는 인식과 발달의 정도에 따라 남성의 구원이 될 수 도, 파멸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이론은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선뜻 자신에게 적용시키기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소위 ‘성역할’에 충실하며 살았기 때문에 내면에 존재하는 이성(異性)의 성향을 억압하거나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역할 역시 일종의 페르조나다. 과도한 마초이즘과 가부장적 성향은 페르조나에 고착된 자아 Ich/Ego를 떼어내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 가면이 사라지고 나면 더없이 나약한 한 인간이 되 버리고 만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율적인 내면의 여성성, 남성성을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과, 우리가 외부에 편향되었을 때 내면의 보상작용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슬플 때 눈물을 참는 것이 남자다움이라는, 약한 척 하는 것이 여성스러움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해보자. 그리고 자신의 이성성을 현빈이나 하의실종 아이돌과 같은 외부의 대상에서 찾는 것은 이성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괴테도 남자들에게 말했다.
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영원한 여성스러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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