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피부묘기증 있으세요?'

묘기증이 있으시다니. 듣기 불편한 높임말이다. 렌즈를 쓰지 못하는 눈이 되어 버려 라식수술 검사를 받으러와서 들었던 여러 질문 중 하나가 내 신체의 변화를 주었다.
그런데 묘기증이 뭐지?

'긁으면 손톱자국이 빨갛게 올라 오나요?'

아. 그런게 있다고 말만 들어봤지. 난 내 걷어올린 팔을 쳐다 보며 그런게 나에게 있을리가 있냐는 듯한 어조로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난 피부묘기증을 얻었다.

가렵고 부어 오르고 더 예민해져서 다시 긁고. 따끔거릴쯤 되서 긁은 자국을 보면 피가 맺힌 허연 가죽이 있다. 마음이 편치 않으니 여러 가지 형태로 몸에 드러난다. 결국 내 눈은 수술에 적합하지 않은 두께를 가지고 있어 의사에게 거절을 당한 대신에.

땀을 흘리면 피부에서 열이 빠져나가 피부질환에 좋다는 말이 생각이 나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사실 달리기를 하면 확실히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낀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버림받은 느낌을 어떻게든 떨쳐버리려고 노력했다. 실연도 문제지만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도 마음을 누르는 큰 이유다.
이렇게 떨어진 자존감으로 불안에 떨며 사는 건 미칠 노릇이다. 어둠속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가장 고약한 저주일 것이다. 그런 무너진 마음을 가지고서 피부묘기증이라는 희한한 이름의 병이 생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닌가. 위장병이 안 생긴 것만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뾰족한 돌파구가 없는 상황에서 가장 매력이 있는 선택지는 바로 피하는 것이다. 나는 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냥 아는 모든 얼굴들을 잠시 아니 실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누구나 앞이 보이지 않을 땐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가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나는 운이 좋게 그런 필요할 때 그런 기회를 얻었다. 대책은 없지만 이런 완벽히 숨어 버릴 기회가 생긴 것이 큰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의 긴 여행은 결정되었다.

기대도 컸지만 사실 어차피 차선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 선택이 내 생애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란걸 전혀 알지 못했다. 이런 선택으로 이끈 이전의 모든 불행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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