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멋진 미래를 계속 상상한다. 

  거창한 목표가 아닌 가까운 미래의 행복한 내 모습을 그리면서 현재의 인내와 절제가 가치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낮추고 의지력을 기를 수 있길 바란다. 자제력이 떨어지거나 불안감이 찾아오면 눈을 감고 좋은 기억을 떠올리거나 멋진 미래를 상상해보자.

2. 감사함과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잊지 않고 자부심을 갖는다.

자기 학대적인 언어로 자책을 하지 않는다. 내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자신을 고통 속에 빠트리지 않는다. 더 잘하기 위해 채찍질만 하지 말고 내가 하고 있는 일,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선택한 것들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본다. 내가 내 연인, 가족, 친구 그리고 사회를 이롭게 하는 일을 결국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3. 겁부터 먹거나 패닉에 빠지지 않는다.

패닉이 습관이 되었다. 마음이 혼란스러울 땐 멈춘다. 가만히 기다려 보고 멍해지지 말고 곰곰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 괴로운 생각이 들면 생각을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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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오늘은 올해들어 가장 아름다운 하루였을 거다. 

클라우디아 오빠 부부가 이탈리아에 돌아왔고 나는 가족들의 점심 식사에 초대 받았다. 

늦잠을 자서 shit하면서 일어났고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프로세코와 디져트를 샀다. 

클라우디아 입이 닳도록 말한 아빠 이바노의 음식자랑도 기대 됐고 무엇보다 털이 팡하고 터지고 살이 오른 유키를 오래 전부터 너무 다시 안고 싶었다. 

나지막한 산들이 둘러쌓고 있는 클라우디아의 집으로 향하면서 저멀리 다른 산이 구름으로 이루어진 바다위에 섬처럼 떠있는 게 보여 우리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클라우디아의 아버지 이바노와 어머니 테레자에게 인사할 때 뺨에 키스를 할지 악수를 할 지 궁금해 클라우디에게 물었다. 

막상 도착하니 예상과 달리 테레자는 나에게 먼저 악수를 청해서 내가 먼저 뺨을 갖다댔고 이바노는 먼저 키스를 했다. 그렇게 따가운 수염을 닿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한 거실과 나무 오븐을 쓰는 주방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엔리코와 샤우를 처음 만났다. 엔리코는 사진과 똑같았고 샤우는 아주 말랐지만 기품이 있었다. 

테레사가 말없이 내준 첫 요리는 라디끼오 라자냐. 파스타가 얇고 주변은 바삭하게 익어서 전혀 느끼하지 않았고 라디끼오와 섞여있는 파나의 깊은 맛이 너무 부러웠다. 

두 번째 요리는 이름을 잊었다. 부럽게 익힌 소 창자를 페퍼론치노, 곱게 간 양파가 들어간 토마토 소스에 버무린 요리였다. 소 내장이 하얗고 조그맣게 생겨서 첨음엔 뇨끼인줄 알았다. 

한국에서는 쫄깃한 소 곱창만 먹어 봤다고 이렇게 부드럽고 냄새가 전혀 안나는 내장요리를 먹어 본 건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다. 특히 곱게 갈린 양파가 소스의 점도를 높이면서 달콤한 맛과 함께 혀에 부드럽게 감기는게 너무 좋았다. 

그리고 하일라이트로 포카챠에 남은 소스를 긁어 먹는 것. 식사를 마친지 5시간여가 지난 지금 다시 그 맛이 그리워진다. 

식사를 마치고 클라우디아 엔리코로 부터 선물 받은 최신 노트북/태블릿 pc를 함께 구경했다. 근사했다. 화면 전체가 터치 스크린이고 얇은 휴대용 키보드와 스타일러스가 딸려있다. 아이패트 프로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유키를 만나러 가는 시간. 다시 만난 게 너무 기뻐 두팔을 벌리고 뛰어가자 유키는 놀라서 몸을 숨겼다. 다시 쪼그려 유키에게 다가 머리아 등을 쓰다듬으니 바로 그르릉 거렸다. 아직 나를 기억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유키가 편안해 하는 눈치라 살짝 품에 안아 들어봤다. 내 얼굴을 유키 얼굴에 가져가 대보니 눈물이 날 것 처럼 황홀했다. 

이렇게 영원히 유키를 안고 싶었지만 불편해 하는 기색이 보이여 살포시 유키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쪼그려 앉은 내 주위를 빙빙돌며 내 다리에 얼굴과 머리를 부벼주니 마치 교황으로 부터 축복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만으로 기쁨과 행복함으로 충만한 하루를 보낸 기분이다. 

산에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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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녔던 초등학교 홈페이지를 우연히 들어가 보았다. 

뻔하디 뻔한 말들 사이에서 나를 놀래킨 건 다름아닌 숫자였다. 

'아니 요즘 아이들도 줄어다는데 아직도 한 반에 우리때랑 비슷한 수의 학생들을 모아놓았구나.'

하지만 이건 나의 착각이었다. 한 학급의 학생 수라고 생각했던 그 숫자는 다름 아닌 학년 전체를 학생 수였다. 

나는 이게 광역시의 위치한 초등학교인지 시골 분교인지 햇갈리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평균 50여명의 학생들이 각 학년마다 3개의 학급에 나눠져 있다. 

30년 전 내 초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니 아연실색했다. 내 기억으로는 전체 학급수가 거의 10개의 가까웠으며 교실은 빈틈이 없을 정도로 아이들로 가득찼다. 

더 놀라운 건 교실 부족으로 인해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눠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내가 학교에서 본 아이들의 2배의 숫자가 동시에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은 그게 사실이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자녀들인 내 세대가 이러했다. 

2000년대 초반 초등학생들의 습격을 '초글링'이라고 표현한 말이 있었다. 하지만 그말은 옳지 않다. 80년말 90년 초 초등학생 수야 말로 저글링 만큼 흔했지 그에 비하면 21세기 초등학생 수는 울트라리스크 만큼 귀한 것이었다. 

나야말로 초글링 세대였었다. 

부디 지금의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발에 차이는 우리 세대보다 더 귀한 대접을 누리길 바란다. 대학에서든 회사에서든 어디서든. 

인구절벽이라는 말이 비로소 실감이 난다. 그래도 현재의 징병제, 값싼 인건비 등이 모든게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으로 희망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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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명 이영광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나무는 간다>(창비, 2013) 수록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이 랭보의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이 문장이 포함돼 있는 다음 대목 전체에 찬성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난 여자들을 사랑하지 않아. 모두 알다시피 사랑은 재발명되어야 해. 여자들은 안전한 자리를 바랄 수밖에 없어. 일단 그것을 얻고 나면 마음이니 아름다움이니 하는 것은 내팽개쳐지지.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차가운 멸시뿐인데, 그게 오늘날 결혼의 양식이야.”(‘착란 1’ 중에서) 여자들은 본질적으로 안주(安住)를 지향하기 때문에 진지한 사랑의 실험을 함께 할 수 없다는, 동의할 수 없는 편견이 이 대목에 담겨 있다. (다른 시 ‘콩트’(conte)에서도 “사랑의 놀랄 만한 혁명성”을 실험하는 ‘왕자’는 궁전의 여자를 모두 살해한다.)

물론 저 말들은 시인 자신의 육성이 아니라 ‘착란 1’의 화자(여자)가 인용하고 있는 연인(남자)의 말이지만 그 연인을 랭보라 볼 근거가 시의 다른 대목에 많으므로 저 발언도 랭보가 한때 몰두했던 생각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숙한 여성관은 제거하고 그의 취지라고 할 만한 것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부르주아적 논리와 관습에 오염되어 단지 이익의 거래가 되었을 뿐이며, 사랑의 아름다운 귀결로 간주되는 결혼이란 차가운 멸시를 먹고 사는 괴물일 뿐이다.’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현대적 사랑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시도하는 (알랭 바디우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랭보의 저 구절은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다.

‘사랑의 재발명’이라는 매력적인 발상의 기원이 랭보에게 있음을 짚어둔다는 게 그만 서론이 길어졌다. 랭보가 말한 것은 발명이 아니라 재발명이다. 어떤 가치/제도의 재발명을 주장하는 사람은 혁명적이다. 기존의 것은 가짜라고, 진짜는 다른 곳에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재발명이 아니라 발명에 대해 생각하려 한다. 무너뜨릴 것도 없는 데서 무언가를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이의 그 두렵고 힘찬 마음에 대해서 말이다. 시인 이영광의 네 번째 시집 <나무는 간다>에는 ‘사랑의 발명’이라는 시가 수록돼 있는데 3년밖에 안 된 이 시를 300년이나 3000년은 된 시처럼 아득한 마음으로 읽어보는 때가 나에게는 있다.

그렇게 아득해지는 것은, 이 시가 어느 저녁 술집에 마주 앉아 절박해져 있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유사 이래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처럼 보여서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위태롭다. 그는 지금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그냥 죽어볼까 생각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살다가 살아보다가”라고 했으니 여하튼 최선을 다할 것 같기는 하되 예감은 좋지 않다.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겠다는 뉘앙스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때가 곧 오리라는 뉘앙스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인간이 더는 못 살겠는 때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살 ‘방법’이 없거나(불가능), 살 ‘이유’가 없거나(무의미).

그런데 왜 그는 하필 다른 길을 두고 구덩이를 파고 누워 곡기를 끊는 길을 택하겠다는 것일까. 나는 제 무덤을 파고 거기 산 채로 기어 들어가 서서히 굶어 죽어가는 사람의 표정과 마음을 상상해 본다. 어렸을 때 ‘자신을 죽이다’(kill myself)라는 영어 표현의 강력한 실감에 놀란 적이 있는데(‘자살’이라는 말은 ‘suicide’가 그렇듯이 내게는 관념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이 사람이 하려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보고 누워 자신을 서서히 죽이는 일. 이 죽음은 신이라는 가장 결정적인 관객을 염두에 둔 최후의 저항처럼 보인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 때 인간이 무책임한 신을 모독할 수 있는 길 중 하나가 그것이지 않은가.

화자에게 그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이라도 그럴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나라도 곁에 없으면”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속으로 무심코 저 생각을 했다가 스스로도 놀라버렸을지 모를 한 사람을 생각한다. 내 앞에서 엉망으로 취해 있는 사람을 바라보며, ‘나라도 곁에 없으면 죽을 사람’이라는 말을 ‘내가 곁에만 있으면 살 사람’이라는 말로 조용히 바꿔보았을 한 사람 말이다. 그런 순간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 사람을 계속 살게 하고 싶다고,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게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이 세상에는 한 인간에 의해 사랑이 발명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동정이 아닌가? 사랑과 동정을 혼동하지 말라는 충고를 우리는 자주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요즘 나는 사랑과 동정이 깊은 차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특정한 요소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동정이라면 말이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안쓰러워 그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마음을 사랑이 아닌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더 정확할 수 있단 말인가. (권여선의 소설 ‘봄밤’을 읽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이영광과 권여선을 함께 떠올리고는 한다. 1965년에 태어나 안동에서 자랐다는 공통점 때문이 아니다. 작품으로 판단하건대, 인간의 약함을 누구보다 연민하지만 그 안에 자기를 용서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섞지 않는 두 사람이어서다. 그렇다.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먼저 인간 모두를 용서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그냥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어디선가 가브리엘 마르셀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 시의 ‘너’는 산으로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마르셀의 문장은 뒤집어도 진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네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어떤 불가능과 무의미에 짓밟힐지언정 너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으면 너도 죽으니까, 이 자살은 살인이니까. 그래서 이 시의 ‘나’ 역시도 이렇게 시를 쓰면서 내내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 시를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로 읽었다. 나는 인간이 신 없이 종교적일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를 생각하는 무신론자인데,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환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56477.html#csidx57532735224e126804e1edc419b7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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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과학 소설의 클래식이라고 소개 되는 할 클레멘트의 중력의 임무를 드디어 읽었다.

재작년에 마션 이후 첫 SF소설이었는데 내가 SF 취향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었다. 이 소설을 마쳤을 때 중력에 임무에 대한 감상을 남기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책이다. 

소설이 처음 발행된 건 1953년이고 아래는 내가 읽은 1978년에 출판된 발렌타인 본의 표지이다.  이 표지 디자인이 스포일러일 줄은 소설의 거의 끝에 가서야 깨달았다. 보통 소설의 도입부에 관한 삽화가 들어가는 다른 책 표지에 비해 온갖 고난을 해치고 나서 다다른 임무의 수행의 클라이막스를 저렇게 날 것으로 보여주는 대담함에 놀랐다. 덕분에 처음에 정말 머릿속에 그리기 어려웠던 외계 지적 생명체인 메스클린인들의 모습을 파악하는 대는 더 이상의 상상이 필요 없어졌다. 그렇다. 그들은 외계 집게벌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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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이 책의 다른 표지들도 찾아보았다. 클래식답게 정말 수십여개의 서로 다른 표지들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초창기 삽화들이 들어있는 표지들은 소설의 한 장면들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어 요즘 티저 영상의 한 장면 같다.

 

 

 

 


 감각적인 표지들도 찾을 수 있었는데 모두 근사하다.  

   

 

 

 

 

소설을 읽는 내내 나의 부족한 SF소설 독서량 때문인지는 몰라도 계속 마션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조력자와 통신을 하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이 제일 유사했다. 또한 소설의 목표가 되는 우주선을 찾아 미지의 행성을 모험하는 설정과 그리고 지리적 난관들이 항상 큰 걸림돌이 된다는 점도 매우 비슷했다. 그리고 먼 거리의 조력자들은 기술과 자원은 충분하지만 주인공에게 다다를 수 없어 주인공은 그런 제한된 지식과 자원 내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 상황은 SF 광팬이라 자처한 마션의 작가 앤디 와이어도 분명이 읽었을 이 책이 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으리라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한 난관 하나를 겨우 극복하고 한 숨 돌릴라 치면 금세 모든 걸 끝장 내버릴 것 같은 생각지도 못한 난관이 연이어 등장한다. 하지만 주인공들은 기발한 또는 우연한 방법으로 그것들은 무사히 넘기면서 독자를 소설에 몰입하게 끔 한다. 아마 이게 전형적인 SF소설의 전개 방식이 아닐까 싶다.

독특한 점은 외계의 지적 생명체가 인류보다 낮은 과학 문명 속에 살고 있다는 배경이다. 이는 헐리우드식 SF에 익숙했던 나에게 정말 신선한 설정이었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외계 문명은 인류가 이해하지 못할 수준의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그 점이 우리가 공포를 느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이는 당연히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알기도 전에 우리의 존재를 먼저 알고 있고 심지어 수만광년 떨어진 지구까지 찾아왔기 때문에 우열은 쉽게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컨택트 (Arrival)의 외계인들처럼 선의를 갖고 오신 분들이길 기대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정말 마음먹고 침공을 결심해서 지구에 온 것이라면 영화 같은 그런 신파적 지구 수호는 상식적으로 포기하는 편이 낫다. 미련하게 트럼프가 공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려 개죽음만 늘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G20은 신속하게 그들의 식민지를 자청하거나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여 생존을 도모하는 편이 더욱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아마 이는 UN이나 NASA의 외계인 출현 시 상황 매뉴얼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을까 강력하게 추정하는 바이다. 

 인류는 아직 롤링 발칸을 개발하지 못했기에 지구 방위는 꿈도 꿀 수 없다

아쉽게도 인류는 아직 롤링 발칸을 개발하지 못했기에 지구 방위는 꿈도 꿀 수 없다. 

그리고 이제 보니 롤링 발칸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아래 둘과 핑크의 한 쪽 팔일 뿐이고 레드와 옐로우는 폼만 잡고 있다. 뭔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대학교의 조별 발표가 겹쳐진다. 레드는 뭍어가다 자기 이름 맨 앞에 올리는 조장놈. 하지만 옐로우는 많은 80년대 생 소년들(나)의 첫 사랑이었으니 특혜를 인정한다.  


소설을 마치고 한 가지 씁쓸한 점은 있다. 열등한 외계인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이 과거 "신대륙"에 도착한 우월한 서구 백인의 것과 다소 겹쳐 보였다는 것은 아쉽다.  지구인들이 낮은 수준의 기술 문명을 가진 외계인을 계몽시킨다는 결론은 마치 미개한 문명을 교화시킨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인 시각이 느껴진다. 과거 백인들은 침략 국가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신앙인 기독교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이 소설에 적용해 보면, 종교는 과학 기술로, 식민 국가 주민들은 메크를린인으로 치환하여 생각할 수 있다. 지구인(백인)들의 우월성을 바탕으로 원주민들(메스클린인)이 먼저 자발적으로 기술 전달(개종)을 요청해서 그리했을 뿐이라며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들의 논리가 이 지점에서 떠오른다.

소설 내내 메스크린인들의 지구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협조가 특별한 설명 없이 소설 막바지까지 이어지는게 제일 의아했다. 아무리 신기한 기계를 가졌다 한들 그래도 문명인들인 메스클린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그들의 무리한 요청을 들어줄 만큼 종교와도 같은 지구인들의 지위가 조금 납득하기 힘들었다.

심지어 모험의 동기 역시 불공평하다. 지구인들이 위험천만한 탐험의 대가로 제공하겠다는 것이 고작 기상, 지리 데이터이고 지구인들은 그에 반해 메스클린인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면 엄청난 경제적, 기술적 이득을 얻게 된다. 그런데 메스클린인들은 정보의 비대칭에서 오는 이러한 엄청난 불리함을 알고 있다. 비록 그 외계 생명체들이 이문을 위해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는 상인이라지만 불확실한 수익에 목숨을 걸 정도로 맹목적이다. 이는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손에서 금과 은을 가져가고 대신 성경책을 쥐어 준 것과 다름없는 불공평한 거래나 마찬가지로 보인다. 물론 메스클린의 입장에서 지구인들의 과학 기술만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 것을 기대하는 건 충분히 합리적일 수 있다. 하지만 지구인에게 이용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친절한 협조를 여러 위기가 닥쳐도 포기하지 않는 다는 점이 결론을 읽고 나서도 개운하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한 수많은 리뷰들이 외계인과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에 대한 찬사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난 한쪽의 일방적인 헌신과 불평등이 호의, 우정 등으로 대충 얼버무려 미화시키는 의견들에 동의할 수 없었다. 소설만 보자면 오래전에 출판되었음을 감안해도 매우 과학적으로 설득력이 있고 신선하다. 미지의 지적 생명체들 간의 이상적인 조우도 잘 묘사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이 리뷰 역시 소설 보다는 너무 영화 리뷰 같다고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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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꼬리에 대한 경배/성선경


삶이란 쥐보다 

쥐머리보다

쥐꼬리에 매달리는 것

쥐꼬리만한 희망과

쥐꼬리만한 햇살과

쥐꼬리만한 기대에 매달리는 것

우리를 움직이는 건 신(神)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는 건 오로지 쥐꼬리

뻥튀기보다 얇은 쥐꼬리

뻥튀기보다 밥맛인 쥐꼬리

그 쥐꼬리에 매달리는 것

쥐꼬리 고까이 꺼

쥐꼬리쯤이야 그래도

쥐보다

쥐머리보다

쥐꼬리에 매달리는 것

우리의 삶은 늘

저 가늘고 긴 쥐꼬리에 경배하는 것


(성경선, 시인,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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