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기록함으로서 역사가 될 것이다.

나는 기억이 닿는 나의 기억을 더듬어 기록하고 남기고 싶다.

잊고싶지 않고 내가 남기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 버릴 것이 슬프기 때문이다.

나는 광주로 간다.

1986년 쯤 나는 진주에서 운암동 주공아파트 67동으로 이사한 날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당시 5살 가량이었던 나는 제일 작은 장독항아리 하나를 들고 이사를 돕는 답시고 나른 기억이 있다.

우리 가족은 5층 아파트의 1층 좌측의 아파트에 살았다.


소화전 비상벨을 호기심에 눌러 놀란 기억

어두우 저녁 달걀 2개를 사러 갔다 집앞 계단에서 넘어져 깨뜨린 기억

비오는 날 창밖으로 비냄새를 맞으며 덩실덩실 춤쳤던 기억.

누런 햇빛아래 처음으로 백과사전과 과학 만화를 책상에 앉아 읽던 기억.

성마른 아버지가 밥상을 엄마에게 뒤엎던 기억.

이웃 동에 사는 친구 집에서 건담이 나오는 만화책을 처음 봤던 기억.

자연과 어린이라는 어린이 잡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 (특히 그 잡지에 소개된 어린이 요리 사진이 그렇게 먹음직스럽게 보일 수 없었다. 치즈와 햄이 들어있는 하마 모양의 샌드위치가 기억나네)

동네 놀이터의 어떤 할아버지가 돌맹이로 보여준 손장난에 정말로 내 손바닥안으로 돌이 들어간 줄 알고 걱정했던 기억.

눈이 내리는 날 집에 엄마가 없어 다시 유치원으로 돌아와 난로위의 피어오른 주전자 증기기 뒤로 눈내리는 창문을 바라 본 기억.

신나던 유치원 옥상의 롤러스케이트. 하지만 끔직히도 싫었던 그곳의 계피 우린 물.

문봉주라는 친구의 유쾌하고 상냥하셨던 어머니.

누군가로 부터 받은 큰 용돈으로 사먹은 그 당시에 한참 광고를 하던 '삼강 대롱대롱'의 오렌지맛

아버지랑 놀이터 갈때 마다 했던 그네를 열심히 굴러 아버지가 높이 든 손에 발 닿기.

친구네 집에서 본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기념주화 동전들을 몰래 가져나와 바닥에 내동이쳐 꺼낸 기억.

처음 우리집에 빨간 전화기를 설치한 날. 전화번호는 54에 0106. 아버지는 항상 백육번이라고 부르는게 이상했던 기억.

전기오븐을 산 어머니가 자주해 주셨던 초코볼이 들어간 계란케익.

미로같이 생긴 담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놀이터들.

처음 유치원을 가서 칠판에 써있는 글씨를 따라 쓰던 기억.

겨울에 입던 조끼가 눈에 젖어 말리기 위해 난로위에 올려놓다 꼬실라 먹은 기억.

노태우가 당선되었던 대선 때 단지내 건물로 부모님이 선거를 하러 가시던 기억.

엄마와 항상 함께 가던 여탕에서 유치원 선생님을 만나 반갑게 인사했는데 엄마와 선생님이 서로 그리 반가워 하지 않았던 기억.

 항상 신기한게 가득했던 '종합상가'라는 크고 검은 글자가 벽에 그려진 건물.

그리고 그용도가 항상 궁금했던 철망이 휘감싸고 있는 넓은 잔디밭과 버섯처럼 튀어나온 구부러진 파이프들.

공장안에 집이 있던 현욱이라는 친구의 집에서 들리는 굉음과 그 집에 본 가면맨 만화.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2012년 나는 그곳을 다시 찾았다.

내가 무관심하던 사이 재개발이 되어 그당시 흔적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집도, 골목도, 가게도, 놀이터도, 소나무들도 심지어 길 마저.

한눈에 몇층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높고 큰 아파트들이 벽처럼 서서 그 무게감으로 내 모든 기억을 깔아 뭉게버린 것 처럼 느껴진다.

그 모습들은 어릴적 공상과학만화에서 보여주던 회색빛의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모습과도 같아 보인다.

사진을 찍은 위치의 오른쪽에 내가 살던 67동이 있었다.

그리도 앞으로 보이는 길 끝에 관리사무소라는 건물과 높은 굴뚝이 있었다.  


67동의 건너편도 넓은 벽이 서있다.

내 기억이 사라져서 느끼는 미움을 떠나 이런 폐쇄적이고 거대한 건물이 주는 위압감이 과연 살기 좋은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떻게 보아도 맘에 들지 않는 곳이다.

보이는 건너편엔 봉주네 집, 내가 다니던 '선일유치원'이 있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당시 그만큼의 규모와 시설을 갖춘 유치원은 흔치 않았을 것 같다. 총 3 규모였고 램프로 꼭대기층에 다달으면 바닥 전체를 초록색 롤러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난 그곳에서 자주 롤러스케이트를 빌려탔었다. 기억으로는 사람들이 꽤나 많았었다.

유치원에 대한 기억은 정말 이렇게 떠올릴려고 하면 계속 쏟아져 나온다. 그이유는 아마 내 어린시절의 기억이 시작되는 시점과 거의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몇달전 내가 살았던 이 곳을 돌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나무 한그루, 놀이터의 놀이기구 하나까지 완벽하게 눈앞에 펼쳐졌던게 너무 인상 적이었다. 

이곳에서의 기억은 따로 하나하나 적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의 자극과 인상들이 나의 인격과 성향이 형성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 보이는 사진의 왼편이 67동이 있던 곳이다. 사진이 흐린만큼 내 유년의 기억도 먹구름이 드리워 진듯 하다.

오른편에 있던 종합상가 건물은 나에겐 환상의 공간이었다. 다양한 물품들을 파는 점포들이 모여있던 상가는 어린 나에게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여있는 장소로 느껴졌다.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우체국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700여 미터를 가면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나온다. 나는 고등학교를 다니던 3년동안 단 한번도 내가 살던 아파트를 오지 않았다. 나의 포근했던 자궁같은 집이 없어지고 난 지금 당시의 나의 무관심이 가장 안타깝다.

난 아직도 67동 1층 작은 방에서 노란 햇빛을 받으며 책상에 앉아 백과사전을 보며 호기심을 키웠던 어린 나의 모습이 3인칭 시점으로 보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아래 사진의 왼쪽이 주공아파트 단지가 있었던 곳이다. 이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내가 포경수술을 하고,  부러진 오른 새끼 손가락을 끼워맞추고,  감기 몸살이 걸릴 때 다녔던 정찬신 외과가 있다. 외과 담벼락엔 햄버거를 파는 리어카가 있었다. 아삭한 양배추가 캐찹과 마요네즈에 버무려져 구운 고기맛 패티위에 얹혀 은박 포장지에 담겨 따뜻한 유리상자안에 있던 걸 군침을 흘리며 지나다녔던 게 떠오른다.

이골목은 주변의 모든 골목을 누비며 다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른쪽에 가면 친구가 살았던 상아맨션과 무지개 아파트가 있었다. 상아맨션 뒷편의 작은 화단엔 어떤 할아버지가 아끼시는 석류나무가 있었다. 나는 그당시 석류가 무언지도 몰랐지만 친구가 그것을 보여주며 몰래 따야한다고 해서 그냥 따라 갔었다. 나무 주인 할아버지는 우리가 근처에만 가도 빗자루 같은 걸 들고 우릴 쫓아냈고 우리는 겁먹고 도망갔다가 다시 모래 가까이 가보기도 했다. 석류를 훔치고 싶다기 보단 그런 스릴을 즐겼었던 것 같다.

상아맨션 건너편엔 내 친구가 살았던 무지개 아파트가 있었고 그 친구가 살았던 1층에 종종 놀러갔었다. 꽤 큰 거실이 있어고 나무 기둥으로 만든 큰 테이블이 있었다. 그 친구가 동생이 생겼는데 그 여자애는 커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큰 소리로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고래고래 지르는 소녀가 되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성당에서 가장 노래를 잘하는 교리 선생님이셨고 아버지는 아마추어 화가셨다. 그 두분이 한 욕을 그 6살 꼬마애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아래 사진을 찍은 방향으로 우리집이 있었고 우측이 정찬신 외과 가는길, 좌측이 시장으로 가는 길이다. 시장은 그야말로 어린 나에겐 놀이터이자 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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