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게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주말에 뭔가 하지 않으면 후회가 남기에 좀비같은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처음으로 자연사 박물관에 가서 화석과 뼈들을 보았다.
공룡과 같은 시대를 살았을 거대한 길이가 8미터는 될 법한 악어, 꼬리가 몸통 만큼 긴 공룡, 정말 뼈만으로도 아름다운 고래 그리고 인류의 선조들.
가장 멋졌던 것은 여러 고래의 수중에서 녹음된 울음소리였다.
지구에서 가장 평온하고 자유로운 생명체의 언어는 신비로웠다. 설명과 같이 무리에게 전하는 단순한 메세지보다 많은 내용이 있을 거라 믿게 된다.
고래의 말은 이제 내가 가장 이해하고 싶은 언어가 되었다.
고래가 보고 싶어졌다.
7월은 여름 창고 정리 세일 기간이다.
멀리 있는 쇼핑몰에 가지 않고 산 마르코 근처로 갔다. 가는 길에 가이드를 하고 있는 유리와 지나치며 짧은 눈 인사를 나눴다.
많은 가게를 구경했다. 첼리오, 베네통, 마시모 뚜띠, 비알레티, 알 두카 다오스타, 코인.
싼 건 더 싸지고, 비싼 건 여전히 비싼 가운데 평소 근처를 지날 때 마다 꼭 한번은 들여다보게 되는 멋진 남자 옷 가게를 계획에 없이 다시 보게 되었다.
면 반바지를 찾고 있었는데 쇼 케이스에 좋은 소재의 반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지날 때 마다 항상 눈길을 끌었던 옷가게였지만 비싸서 들어가 구경해볼 엄두를 못 내던 곳이다. 오늘은 70%세일이라 길래 큰 맘먹고 처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이 옷 가게는 이탈리아 북부 대도시에 사는 잘 다듬은 은색 수염을 기르고 원색 트라우져와 블레이져에 화려한 패턴의 스카프의 조합을 즐길 줄 아는 이탈리아 중년 남성이 주 고객 층일 법한 곳이다. 나도 이런 스타일이 어울릴까 항상 궁금했지만 이 정도 고급 부티크는 들어가기 어렵다. 그런데 70%세일이라니. 나 같은 이에게도 손을 내미는 듯한 이 기분.
재고 처리를 위해 디스플레이는 잊고 옷가지들을 쌓아 놓은 모습이 나를 더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쇼윈도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진한 갈색의 반바지를 입어보았다. 이런 도톰한 재질과 화려한 안감의 반바지를 처음 착용해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거의 사야겠다는 마음으로 윗 층에 다른 옷들도 살짝 구경해 보러 올라갔다. 반바지가 아닌 수트 바지들이 역시 파격 세일 중이었고 아까 본 반바지와 거의 비슷한 가격의 진한 파란색의 판탈로니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기 때문이다.
남녀 직원이 서로 쉴세 없이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바지를 갈아 입어보았다. 역시 더 좋은 재질의 바지였고 바지 주머니용 안감에는 카날 그란데에서 바라본 14-15세기 베네시안 고딕 스타일의 저택들이 프린트 되어 있었다. 집에 다가 안감이 보이게 걸어 놓고 싶을 만큼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생애 최고의 바지를 만난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 바지님을 집으로 모시고 갈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 몸을 낮춰 주시기 까지!
쇼핑백의 두께마저 두툼하다.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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