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집 1권 '정신요법의 기본문제'를 읽는 차례다.

처음 전집을 읽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을 나의 부족한 몰입을 탓하지 않고 무조건 거친 번역의 탓으로 돌렸던 것이 생각났다.

다시 읽은 1권은 훨씬 친숙하고 몰입이 잘 되서 반갑다.

제목 그대로 정신치료의 시작에 있어 치료자와 환자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한 당부, 현재(융이 활동하던 당시)의 심리학의 위치 등을 주제로한 강연과 발표를 정리한 내용이다.

이번 발제를 맞은 희사 샘은 함께 공부하는 성복 샘을 떠올리며 글을 써왔다.

인간적인 관심과 서로에게 치료자가 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것이 융이 강조한 치료자의 자세일 것이다.  



내가 융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그의 치료자로서 갖추고 있는 철학때문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우리의 몸을 의사에게 내맡긴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의사의 지식과 치료기술로 나의 병을 '알아서' 치료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최면요법은 자칫 의사의 '암시'에 그칠 수 있다.
                             최면상태에서 의사와 환자의 전적인 관계가 형성 될 수 있을까?             
                        융의 병원에는 마주보는 자리만 있을 뿐 환자가 눕는 의자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신의 치료는 그런 일방적인 방향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심리학에서 상담치료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치료자는 자신의 지식과 이론이 아닌 자기 자신을 도구로 환자를 대해야 한다. 환자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생각하고 그의 존재를 수평적으로 대면하는 것으로부터 치료는 시작된다.  

의사는 자신을 이루고있는 모든 지식과 전제를 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접근해야한다고 융은 강조한다. 그래서 융은 치료자란 '이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고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함께 체험하는 자Miterlebender'라고 말한다. 

환자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에게 의사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 전능한 존재로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치료가 투사에서 시작되지만 의사와 환자는 각각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다. 서로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뢰와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 각자의 소견을 '완전히'표현하는 기회를 갖는것. 이러한 표현을 통해 서로의 정신 체계가 연결되어 각자 고유의 정신 체계 속 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것만이 서로에게 정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치료과정을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불렀다.


                                               동방신기도 알고 있던 변증법적 방법!
                             그래서 지금 '정'과 '반'이라는 심오한 반목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용어가 쉽진 않지만 변증법이란 누구나 익숙할 것이다. 단지 융은 치료 과정의 의미로 차용했을 뿐이지 그 의미는 가감없는 진솔한 '대화'에 가깝다.


여기서 수유+너머 이론학교에서 배운 대화의 정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대화 'dialog'의 어원은 두개의 논리가 만난다는 dia(둘)+log(로고스) 뜻이다. 

두 개의 논리가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겪어봐서 알겠지만 정말 치열하고 힘든 작업이다.

로고스는 '분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결합은 Eros)

우리가 힘들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자신의 논리, 즉 언어가 상대방의 것과 분리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반(논리)위에 서서 상대방에게 나의 지반으로 넘어오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그 쪽에선 '니가 넘어와'라고 밖에 답하지 않는다. 

한국인과 독일인이 만나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상대의 언어를 쓰거나 공통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대화란 이러한 성격의 기술 art 이다.

자신의 지반을 고수하는 것, 상대방의 지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두 개의 논리가 만나 새로운 논리의 탄생을 기대할 수 없다. 전적으로 상대방에 발언권을 주는 것 이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의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치료자는 자신의 모든 전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 반드시 필요한 자신만의 '세계관'은 확실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개성을 갖춘 동등한 존재여야 한다. 개인이 집단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별되는 개성을 갖추어야 하고 이 개성은 집단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견해로부터 형성된다. 

개성화 되지 못한 채 집단에 휩쓸린 개인은 신경증을 앓는 환자로 남게 된다. 남을 치료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관은 필수적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며 개성화된 개인, 확고한 자기 Selbst (자아 Ich, ego가 아니다, 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를 찾은 사람이면 스스로 치료자가 될 수 있다고 융은 말한다. 그래서 심리학의 목표는 스스로 치료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겪는 모든 정신의 문제는 모두 개성화 되지 못한 개인으로 남겨져있기 때문임이 분명해진다. 

남과 구분된 자신만의 정신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집단에 휩쓸린 채 살아간다고 100년전에도 융은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소나무의 씨앗처럼 성장하게끔 되어있다. 하지만 같은 소나무라도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지 않는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얼마나 구분되게 살고 있는지를.

그렇다고 남보다 비싼 자동차, 값 나가는 명품을 더 가지는 것이 개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도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Vajrayogini Mandala, Tibet; 18th century, Rubin Museum of Art
                                                     (source:www.jungquotes.co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