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가장 유명한 전래동화인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가 우리나라 것이 아니라는 증거가 인터넷에 회자된 일이 있다. 사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그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이솝우화에서 묘사된 ‘산신령’ 캐릭터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헤르메스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하지만 집단 무의식원형의 개념을 익힌 우리 이론학교 출신 융 학도들에겐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보편적인 원형 상들이 문화와 지역에 상관없이 다양한 형태로 설화나 민담 속에 표현되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임이 이미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복귀하는 의미에서 다음의 세 가지 이야기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자.


 옛날 옛적에 안동의 하회마을에 사는 허도령은 어느 날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그에게 말하길, “너는 산속으로 들어가 집을 지어 그 누구도 보는 사람 없이 탈을 만들어라. 절대 그 누구도 만나지 말 것이며, 어느 누구도 너를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허도령은 그 말씀대로 산속으로 들어가 탈을 깎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마을에 허도령을 흠모하던 처녀가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산속으로 들어가 그가 탈을 깎는 모습을 훔쳐본다. 열심히 탈을 깎던 허도령은 그 처녀를 발견하고는 탈을 마저 완성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린다. 그때 허도령이 만들고 있던 탈은 ‘이매탈’이었다. 그래서 이매탈에는 턱이 없다.

                         턱이 없어 탈을 쓴 사람의 입모양과 표정이 더 살아나는 이매탈
                                              별칭은 바보탈, 병신탈


 사나운 맹수도 눈물을 흘릴 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 오르페우스는 그의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는 험난한 길을 뚫고 저승으로 내려가 저승의 왕 하데스에게 아내들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의 아름다운 노래에 감명 받은 하데스는 둘을 지상을 돌려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단, 저승을 완전히 벗어 날 때 까지 오르페우스에게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 것, 그리고 에우리디케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건다. 저승을 거의 벗어날 때 쯤 뒤를 돌아본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결국 다시 저승으로 떨어지고 만다. 끝내 아내를 못 잊는 오르페우스는 아마조네스의 여인들의 거듭된 청혼을 물리치다 원한을 사 그녀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가장 로맨틱한 비극의 주인공 오르페우스


 에덴동산에 살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신의 명령을 거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죄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남자는 평생 부양을 위한 거친 노동을, 여자는 출산의 고통을 겪는 벌에 쳐해 진다.


위의 유명한 세 이야기의 공통적인 모티프는 첫째로 금기, 둘째로 금기를 깨는, 또는 금기를 깨도록 유혹하는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로인해 파멸하는 남성이다. 사실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2주 전 하회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안에 있던 탈 박물관에서 본 하회탈 설화이다. 이 설화를 읽으면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매우 유사한 패턴의 주제들이 있다는 사실이 세삼 다르게 느껴졌다. 이야기들 속의 모티프에 표현된 원형 상들과 그 작용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페르조나는 개인이 외부와의 관계를 형성할 때 일종의 가면과 같은 역할을 하는 원형이다. 예를 들어 소방관이라는 페르조나를 가진 개인은 집단 안에서 화재진압과 인명구조라는 직무를 갖는 남과 구분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다. 반면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는 개인의 생물학적 성별과 반대되는 성의 특징을 지니며, 자신의 내면과의 관계 형성에 작용하는 원형이다. 무의식에 있는 이 두 원형들은 서로 대극을 이루며 보상적인 작용을 한다. 이를 융은 “무의식이, 페르조나가 자아를 끌어당기는 힘과 같은 힘으로 자아를 내리누르는 듯하다.”라고 표현한다. 퇴직한 중년의 남성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여성스러워지는 것도 직업적 페르조나가 상실되자 자신의 여성성인 아니마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앞선 신화와 민담 속의 남성이 자신의 임무에 매진하는 것은 페르조나의 인력에 해당한다. 그가 신 또는 신에 해당하는 존재로부터 부여받은 자신의 역할과 임무에 충실해야하고 다른 것에 휘둘리지 말아야한다는 것은 바로 금기에 해당한다. 그 인력의 의무감은 곧 금기로써 강화된다. 고립되어 탈을 만드는 총각, 아버지 신의 명령에 복종해야하는 아담, 저승을 탈출해야하는 오르페우스는 신성하고 비장한 의무감, 동시에 금기로부터 비롯된 공포에 사로 잡혀있다.


하지만 페르조나의 강력한 힘에 대한 남성의 무기력함은 곧바로 아니마의 유혹에 취약함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대극의 반작용, 페르조나에 대한 보상으로서 나타난 아니마의 유혹인 것이다. 무의식으로부터의 유혹은 바로 이렇게 아니마라는 원형 상 즉, 여성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런 민담속의 여성들은 이런 비장함과 공포에 쌓여있는 남성들을 그들의 의도와 반대로 향하도록 꼬드긴다. 외부와의 관계에 과도하게 몰입되어 있을수록 한순간에 파멸할 가능성은 커진다. 이러한 사실을 인류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인식했고, 그 위험성을 민담이나 신화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내부의 유혹을 아니마의 화신인 여성들, 즉 팜므 파탈 Famme Fatale 로 이야기 속에 형상화 되었다. 남성의 임무를 방해하고 죽음으로 이끄는 아니마 상들은 사이렌, 스핑크스, 물귀신(처녀귀신) 등 수없이 많은 사례들이 있다. 이 파멸의 과정은 한편으로는 편향된 의식의 위험에 대한 경고로 이해할 수 있다.


                                         치명적인 힘의 팜므 파탈도 있다 

 한편, 아니마가 파멸을 일으키는 아름다운 팜므 파탈의 인물로 묘사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남성에게 지혜와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에 등장하는 팔선녀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구운몽이 개인이 100% 창작한 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담과 종교적 신화의 모티프들을 이용해 작가가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알려진 대로 성서, 각국의 건국 신화도 모두 이와 같은 맥락의 소산물이다. 구운몽의 주인공인 양소유에게 도움을 주는 팔선녀는 아니마의 긍정적인 역할을 표현한 예이다.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가 말한 아니마의 가장 높은 단계인 여신 아테나 역시 성스럽고 지순한 것까지 초월한 지혜를 상징한다.(C.G.Jung 외, 인간과 상징)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아니마는 인식과 발달의 정도에 따라 남성의 구원이 될 수 도, 파멸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아니마 또는 아니무스 이론은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선뜻 자신에게 적용시키기 꺼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소위 ‘성역할’에 충실하며 살았기 때문에 내면에 존재하는 이성(異性)의 성향을 억압하거나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역할 역시 일종의 페르조나다. 과도한 마초이즘과 가부장적 성향은 페르조나에 고착된 자아 Ich/Ego를 떼어내기 힘들 뿐만 아니라, 그 가면이 사라지고 나면 더없이 나약한 한 인간이 되 버리고 만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율적인 내면의 여성성, 남성성을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과, 우리가 외부에 편향되었을 때 내면의 보상작용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슬플 때 눈물을 참는 것이 남자다움이라는, 약한 척 하는 것이 여성스러움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해보자. 그리고 자신의 이성성을 현빈이나 하의실종 아이돌과 같은 외부의 대상에서 찾는 것은 이성을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괴테도 남자들에게 말했다.

Das Ewig-Weibliche zieht uns hinan. 영원한 여성스러움이 우리를 구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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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1권 '정신요법의 기본문제'를 읽는 차례다.

처음 전집을 읽었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을 나의 부족한 몰입을 탓하지 않고 무조건 거친 번역의 탓으로 돌렸던 것이 생각났다.

다시 읽은 1권은 훨씬 친숙하고 몰입이 잘 되서 반갑다.

제목 그대로 정신치료의 시작에 있어 치료자와 환자의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한 당부, 현재(융이 활동하던 당시)의 심리학의 위치 등을 주제로한 강연과 발표를 정리한 내용이다.

이번 발제를 맞은 희사 샘은 함께 공부하는 성복 샘을 떠올리며 글을 써왔다.

인간적인 관심과 서로에게 치료자가 되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것이 융이 강조한 치료자의 자세일 것이다.  



내가 융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 역시 그의 치료자로서 갖추고 있는 철학때문이다.

몸이 아파 병원에 가면 우리의 몸을 의사에게 내맡긴다. 그것은 내가 모르는 의사의 지식과 치료기술로 나의 병을 '알아서' 치료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최면요법은 자칫 의사의 '암시'에 그칠 수 있다.
                             최면상태에서 의사와 환자의 전적인 관계가 형성 될 수 있을까?             
                        융의 병원에는 마주보는 자리만 있을 뿐 환자가 눕는 의자는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신의 치료는 그런 일방적인 방향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다. 심리학에서 상담치료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 때문이다.

치료자는 자신의 지식과 이론이 아닌 자기 자신을 도구로 환자를 대해야 한다. 환자를 자신과 동일한 존재로 생각하고 그의 존재를 수평적으로 대면하는 것으로부터 치료는 시작된다.  

의사는 자신을 이루고있는 모든 지식과 전제를 버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접근해야한다고 융은 강조한다. 그래서 융은 치료자란 '이제 행동하는 주체가 아니고 개인의 발달과정에서 함께 체험하는 자Miterlebender'라고 말한다. 

환자 역시 마찬가지다. 환자에게 의사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지 전능한 존재로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치료가 투사에서 시작되지만 의사와 환자는 각각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다. 서로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뢰와 관심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 각자의 소견을 '완전히'표현하는 기회를 갖는것. 이러한 표현을 통해 서로의 정신 체계가 연결되어 각자 고유의 정신 체계 속 에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것만이 서로에게 정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러한 치료과정을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불렀다.


                                               동방신기도 알고 있던 변증법적 방법!
                             그래서 지금 '정'과 '반'이라는 심오한 반목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용어가 쉽진 않지만 변증법이란 누구나 익숙할 것이다. 단지 융은 치료 과정의 의미로 차용했을 뿐이지 그 의미는 가감없는 진솔한 '대화'에 가깝다.


여기서 수유+너머 이론학교에서 배운 대화의 정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대화 'dialog'의 어원은 두개의 논리가 만난다는 dia(둘)+log(로고스) 뜻이다. 

두 개의 논리가 만난다는 것은 우리가 겪어봐서 알겠지만 정말 치열하고 힘든 작업이다.

로고스는 '분리'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결합은 Eros)

우리가 힘들다고 느끼는 이유 역시 자신의 논리, 즉 언어가 상대방의 것과 분리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지반(논리)위에 서서 상대방에게 나의 지반으로 넘어오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그 쪽에선 '니가 넘어와'라고 밖에 답하지 않는다. 

한국인과 독일인이 만나서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는 상대의 언어를 쓰거나 공통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대화란 이러한 성격의 기술 art 이다.

자신의 지반을 고수하는 것, 상대방의 지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두 개의 논리가 만나 새로운 논리의 탄생을 기대할 수 없다. 전적으로 상대방에 발언권을 주는 것 이것이 창조의 시작이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의사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치료자는 자신의 모든 전제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 반드시 필요한 자신만의 '세계관'은 확실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개성을 갖춘 동등한 존재여야 한다. 개인이 집단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구별되는 개성을 갖추어야 하고 이 개성은 집단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견해로부터 형성된다. 

개성화 되지 못한 채 집단에 휩쓸린 개인은 신경증을 앓는 환자로 남게 된다. 남을 치료하기 전에 자기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자신만의 세계관은 필수적이다. 

거꾸로 이야기하며 개성화된 개인, 확고한 자기 Selbst (자아 Ich, ego가 아니다, 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를 찾은 사람이면 스스로 치료자가 될 수 있다고 융은 말한다. 그래서 심리학의 목표는 스스로 치료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겪는 모든 정신의 문제는 모두 개성화 되지 못한 개인으로 남겨져있기 때문임이 분명해진다. 

남과 구분된 자신만의 정신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찾지 못해 또는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집단에 휩쓸린 채 살아간다고 100년전에도 융은 같은 문제를 지적했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소나무의 씨앗처럼 성장하게끔 되어있다. 하지만 같은 소나무라도 모두 똑같은 모습으로 자라지 않는다. 


마음이 어지러울 땐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얼마나 구분되게 살고 있는지를.

그렇다고 남보다 비싼 자동차, 값 나가는 명품을 더 가지는 것이 개성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도 자기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Vajrayogini Mandala, Tibet; 18th century, Rubin Museum of Art
                                                     (source:www.jungquotes.com)



2010년 7월 16일
 
남한강 4대강 공사현장, 팔당 두물머리 답사

ㅋㅋㅋ

 

여주 강천보 현장.

교각 밑에 여울지는 곳 수심 3m의 낙차를 만들어 놓아 물이 떨어지면서 생기는 것. 고기도 못 지나다님.

보 위로 자전거도로가 조성됨. 그 끝이 산과 맞닿아 있어 산을 계속 더 깎을지 아직도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함.
 
그 반대편엔 친환경 녹색 성장의 상징, 소수력발전소가 연결되어 있음. 생산 전력량이 유지비용에 비해 터무니 없이 부족하여 경제성이 없음. 반드시 폐쇄될 것이라고 함.

건설회사 사람들이 막 뛰어 나왔음.


이제 모래톱 같은 건 없다. 

쉬운말로 이야기 하겠다. 강바닥을 계속 파냈다. 
강바닥과 강 옆의 땅과 높이차가 커져서 강속으로 주변 땅이 침식해 들어간다.(역행침식)
그래서 또 판다.
그 짓을 하다가 하다가 안되겠다 싶어서 사진에서 처럼 강주변을 돌과 콘크리트로 감싸버렸다.   
자전거 도로를 만드는 제방의 경사면에도 침식을 막기위해 콘크리트 블럭으로 덮고있다.

강변의 금모래는 이제 동요속에서나 찾아야 한다. 

 

제방위에서 짖눌린 채 발견되 멸종위기종 단양쑥부쟁이.

전 세계에 단양과 경북 수안포에서만 발견된 식물. 트럭 바퀴자국 위에 쓰러져 있다.

 
충북과 강원도의 경계에 있는 남한강 대교 일대.
보 공사 중인 구간보다 비교적 훼손이 적다.

저 보도블럭을 깔고 있는 곳은 나중에 관광버스를 위한 주차공간이라고 한다.
 


처음 보는 너구리 발자국.

고라니 발자국과 배설물도 많이 보인다.
낮엔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밤에는 남한강 일대 많은 야생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본류 공사만큼 심각한 지천의 수로 공사.

본류로 흘러들어가는 수로를 곳곳에 콘크리트로 직선화시켜 놓았다.

이것이 가장 큰 위험 중에 하나다.
지천(작은 실개천 또는 수로)에 물이 불어나면 직선화된 수로를 따라 빠른 속도로 본류(큰 강줄기)로 흘러 들어가게 만들어졌다.
 원래 실개천은 굽이굽이 물이 천천히 흐르게 되어있어 본류에 물이 불어나는 속도를 늦춰주어 홍수를 예방한다.
또한 바닥으로 물이 빠져 지하수로 저장되고  큰 강으로 합류되는 물의 양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콘크리트로 반듯한 수로를 만들어 놓는다면?



갑자기 쏟아진 폭우 때문에 이포보와 여주보는 지나가는 차속에서만 보았다.

윤영배씨가 노래 불러서 가보고 싶었던 팔당 두물머리로 이동했다.

자욱한 물안개가 폐속을 들어오는 촉촉한 기분이었다.


이곳의 문제를 짧게 소개한다.

이 지역은 2012년 까지 농민들이 유기농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점용허가)해 준 지역이다.

그런데 사대강공사로 인해 허가를 중단한다고 이곳에서 농사짖는 사람들을 내쫓기로 한다. 

그래서 농민들은 소송을 냈다. 그냥 약속된 기간까지 농사짖게 해달라고. 

법원은 사대강 사업보다 유기농업이 더 공공성이 있으므로 점용권을 인정.

이곳 때문에 사대강을 멈출수 없는 일. 국가는 곧바로 항소한다.

농민들은 소송비용 마저 없었다.
다행히 모금으로 비용이 마련되었고 지난 수요일 서울 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열렸다.

어떤 판결이 나올지 지켜 볼 일이다.

두물머리는 두 물, 즉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두물이 만나는 최초에 지점에 십자가가 서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사라지는 건 슬픈 일이다.

이 시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채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참조 : http://8dang.jinbo.net/node/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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