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모임을 갔다. 

책에 대해 말한다는 건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 아니다.

내가 소개하는 책의 종류나 독서량은 내 지성의 척도라 이걸 남에게 드러내는 게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약속 시간에 늦은 나는 부랴부랴 예전에 어디선가 말한 적이 있는 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집어 들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적당히 안 알려져 있고 남들이 다 관심을 가지지만 막상 잘 알기 어려운 분석 심리학에 관한 책이라 허세를 부릴 때 안성마춤이다. 

이 책을 소개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몇 번 잘 먹혀 들어간 적이 있어서 이번에도 또 우려먹는다.

내 앞에 5명이 이런 저런 책들을 소개했다. 

그리고 네번째 사람의 첫 마디가 나의 등판을 짝 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제가 책을 아주 많이 읽어요. 특히 바쁠 수록 책을 더 많이 읽는데 요즘 정말 바빠서 특히 책을 많이 읽었어요."

놀랍다. 

나는 저런 자신감도 없고 실제로 책을 많이 읽지도 않기에 내 차례가 오기도 전에 약간 주눅을 들뻔했다. 

그 사람 앞에는 외국 작가의 에세이 아니면 요즘 핫한 인문학 책쯤으로 보이는 책 한 권 있었다. 세련된 제목 때문에 내용이 궁금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 책을 그냥 요즘 읽기 시작한 책이라고 만 소개하고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 

조금 의아했지만 '맞군. 여긴 내가 이런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란 걸 드러내는 자리였지.'라고 생각하자 더 이상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어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책으로 '어린 왕자'를 꼽았다.  

그런데 또 다시 어린 왕자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걸 읽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는 말로 다시 한번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몇 해 전 어린왕자 애니매이션을 본 게 전부인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린왕자라...물론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한 책이다.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을 위한 이 슬픈 동화로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이후의 토론에서 난 내가 혹시나 비꼬는 말투가 세어 나오지 않을까 계속 단속해야만 했다. 

나도 정말 꼬인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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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는 중학교 시절이 자신의 인생의 최악의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사춘기가 되면 2차 성징이 도드라지는 서양 여자 아이들은 상대적으로 신체 발달이 느린 남자 아이들의 호기심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그 호기심은 잠자리 날개를 양손으로 잡고 반대 방향으로 잡아 당겨 그 속살을 보는 순수한 아이의 것 만큼 잔인하다.

신체적 차이가 같은 반 친구라는 인식을 뒤덮어 버리는 생애 최초의 타자화 경험일 것이다. 

클라우디아는 남자애들의 짓궂은 장난을 피하기 위해 남자애들처럼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가 치마를 입은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남자 아이들의 호기심 해소가 폭력적인 수준에 이르러도 여자 아이들은 별 도리가 없는 것도 한국과 마찬가지다. 

더러운 농담과 심한 장난이 워낙 일상적이라 화를 내거나 울면 과도하게 예민하고 쿨하지 못한 아이 취급을 받는다. 이것은 아이들 사이의 권력 관계에 가장 막강한 영향을 미치는 무리에서 배제될 수도 있는 큰 위험이다. 

그렇다고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해도 그들은 그리 적극적인 개입을 하지 않는다. 사이좋게 지내라는 훈계 수준으로 자신의 도리를 충분히 다 했다고 여긴다. 그 이후의 다른 남자 아이들의 보복성 장난은 고스란히 일러바친 아이의 몫이 될 것이 뻔하다. 

꽤나 놀라웠다. 내가 지금까지 느낀 이탈리아 여성들에 대한 인식과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이탈리아 여자들은 언제나 기분껏 입을 가리지 않고 큰 소리로 웃는다. 상대방이 어이없는 소리를 하면 손끝을 모아 흔들며 무슨 소리냐고 되물을 줄 안다. 다리 사이가 살짝 보이는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어디 서나 편하게 앉고, 담배 피우는 모습이나 문신이 남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 와서 성적 수치심이라는 게 남성들이 여성을 제압하고 통제하기 위해 고안해낸 것인지 진짜 인간의 본성인지 가끔 헷갈리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당당한 이탈리아 여자들 대부분의 학창 시절 역시 이런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도 남자 아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넘어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는 게 의외였다. 나는 한국 여자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지위를 갖는 이탈리아 여자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어떻게 저런 굴레로부터 해방되는지 아직 너무 궁금하다. 

물론 그녀들이 한 순간에 완전히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가 되는 경우는 물론 여기 서도 없다. 이탈리아는 서구에서도 손꼽히는 여성 혐오와 성차별 국가이다. 요즘 한국 인터넷에 회자되는 '이탈리아 여행 중 로맨틱한 이탈리아 남자들의 시적인 픽업 라인 들어보기'는 한국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예쁘장한 얼굴의 재벌 3세와의 달콤한 신데렐라 스토리만큼 비현실적일 것이다.        

한편, C가 미디어에서 본 일본 선생과 제자 사이의 강한 유대가 개인주의의 문화에 속한 그녀에게 부러울 정도로 인상적으로 보였나 보다. 

나는 나의 한국 대학원 지도 교수님과의 특별한 유대에 관한 좋은 예시를 소개하며 그녀의 선입견을 더 강화 시켜준 것에서 멈췄다. 그리고 나의 어린 시절 선생들과의 포스트 트라우마적인 수많은 악몽들은 굳이 말하지 않기로 했다. 기억을 하나 하나 끄집어 내다가 피어오를 나의 독기가 그녀에게 느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몇몇 선생님과의 멋진 추억도 말해주었다. C를 너무 좋아했던 한 선생님은 새로 태어난 자신의 딸에게 같은 이름을 지어줬을 정도로 그녀를 특별히 아꼈고 수업 이후에도 연락을 주고 받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선생님과의 남다르게 친한 관계를 부담스러워한다.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단지 그녀는 자신이 정한 어떤 거리 이상으로 누군가가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는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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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남자를 만났다. 

이탈리아에서 1X년째 지냈다는 그의 몸에서는 여전히 가시지 않는 냄새가 있다.

나 역시 한국을 벗어나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바람에 희석시키고 싶었던 바로 그 냄새.

인사와 함께 시작된 첫 5분간의 대화의 형식을 취한 그의 난데없는 충고는 나를 순식간에 한국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 짧은 시간 만에 그는 능숙하게 나를 자신보다 아래의 위계로 시나브로 밀어 넣으려 했다. 

눈치는 없지만 이런 종류의 서열 정리는 동물적으로 알아채는 능력을 체득한 내 머릿속은 경보 신호로 요란하다.

틀에 박힌 패턴들. 

고향이 어디냐. 말투를 들어보니 딱 알겠더라. 연이은 슬쩍 말을 놓기. 

그래도 비록 자신은 가까운 지역 출신의 선배지만 (정작 자신의 출신은 말 않는다.) 초면에 상대의 나이를 물어보는 무례를 범하지 않은 세련된 매너의 소유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참 하나를 발견하고 자신이 그동안 피눈물 흘리면 깨달은 진리를 너를 위해 미리 알려주겠다는 듯한 그의 따뜻한 배려심에 알러지 반응이 일어 나는 자꾸 옆 사람에게 구조를 바라는 눈빛을 보내본다.  

서글펐다.


내가 느꼈던 좌절감이 너를 피해 갈 리 없다.

너도 그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너도 알아야지.

혹시나 너의 좌절감이 너를 피해가거나 나보다 작아선 안되. 

그래서 너는 나의 충고를 들어야 하지만 내 충고대로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나이를 불문하고 내가 짧은 해외 체류 중 만난 남자 '인생 선배'들은 대부분 교묘하게 아니면 노골적으로 어떤 식으로 든 나에게 저 뜻을 전하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다. 

어느덧 나는 이들의 냄새를 잘 맡게 되었다. 굳이 냄새를 맡을 만큼 가까이 있지 않아도 멀리서 관상만 봐도 알아 채는 능력으로 발전하고 있다. 꽤 유용할 것이다.    

동시에 내가 풍기는 같은 냄새를 알아차리지 못해 항상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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